『마지막 난간에』는 2026-10-14 출간 예정입니다. 출간되면 서점 판매 링크와 함께 이메일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오래된 방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 그 방에는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소리가 있고 냄새가 있고 빛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지 위에 남겨진 98이라는 숫자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현관문을 여는 열쇠 소리일 것이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비 오는 날 식탁 아래에서 구겨졌던 그림 한 장일 것이다. 평소에는 그 문을 닫아두고 살아가지만 뜻밖의 순간 문틈으로 오래된 기억이 들어온다.
에이미에게 98점은 좋은 점수가 아니었다. 시험지를 받아든 어린아이는 잠시 기뻤지만 “1등은 누구야?”라는 말 앞에서 자신의 기쁨을 접어야 했다. 그 뒤로 잘한다는 것은 끝까지 잘해야 한다는 뜻이 되었고, 98 다음에는 100이 있어야 했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마음속에서 오래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조금만 더 잘해야 한다고, 다음에는 틀리면 안 된다고,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고. 어쩌면 사람은 누군가에게 받은 말보다 그 말을 자기 안에서 되풀이하는 목소리 때문에 더 오래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에게는 열쇠 소리가 있었다. 늦은 밤 현관 밖에서 들려오던 발소리와 찰칵 돌아가던 열쇠, 문이 열리면서 밀려들어오던 술 냄새와 차가운 밤공기, 벽에 부딪히던 신발 소리, 식탁 위에 놓이던 술병 하나. 그 작은 소리들이 어린아이에게는 그날 밤의 날씨보다 더 정확한 신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숨을 죽이고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고 자신의 몸을 작게 만드는 것. 민주가 배운 침묵은 성격이 아니라 그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었다.
정희에게는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져온 그림이었다. 학교에서는 잘했다고 칭찬받았지만 집에서는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라는 말을 들었다. 아이는 그림을 접었고, 말도 접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물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을까, 내가 너무 예민했을까,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그렇게 접힌 종이는 서랍 속에 있었지만 사실 접혀 있던 것은 종이만이 아니었다.
수진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표정이 조금 달라지는 것, 목소리가 낮아지는 것, 발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워지는 것을 먼저 알아차렸다. 그래서 어느 저녁 옥상 난간 가까이에 서 있던 에이미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러나 수진은 서둘러 다가가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춥죠?”라고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냐고 캐묻지 않고 따뜻한 것을 하나 마시자고 했다. 그날 밤 수진이 건넨 것은 해답이 아니라 곁이었다.
이 작은 장면들을 붙잡고 이 소설을 써 내려갔다. 사람의 상처는 거대한 사건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어깨가 먼저 굳는 것, 누군가의 한마디에 하루 종일 자신의 잘못을 찾는 것, 하고 싶은 말 앞에서 “괜찮아요”라고 먼저 대답하는 것, 빵 모양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먹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생활의 모습 속에 상처는 숨어 있다. 그래서 회복 역시 거창하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에이미가 다시 빵집에 들어가 조금 모양이 찌그러진 빵을 그대로 골라 먹는 일, 실수한 뒤 밤늦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다시 확인하는 일, 화분에 물을 주다가 흙이 젖어 있는 것을 보고 더 주지 않는 일. 정희가 오래된 상자를 장롱 깊숙이 밀어 넣는 대신 햇빛이 드는 책장 위에 올려놓는 일. 민주가 큰 목소리에 잠시 몸을 굳히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조금 놀랐어요”라고 말하는 일. 수진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해결하려 하지 않고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며 기다리는 일. 나는 그 작은 변화들이 회복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옥상이 있었다.
한때 에이미에게 옥상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장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같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다시 누른다. 숫자가 하나씩 올라가고, 문이 열리고,
그날과 똑같은 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난간도 그대로이고 도시의 불빛도 그대로다. 에이미는 차가운 철을 손으로 만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에 힘을 준 채 서 있지 않는다. 한 걸음 물러선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물러선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로 돌아선다.
그 장면에서 회복의 의미를 보았다. 과거의 장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서 있는 내가 달라지는 것. 상처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상처가 더 이상 내 다음 걸음을 결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 마음의 정원에 놓인 작은 화분도 그래서 중요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던 새잎 하나가 어느 날 조금 더 자라 있었다. 누군가는 물을 주려고 했고, 누군가는 많이 주면 안 된다고 했다. 사람도 식물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숨 쉴 틈이 없어지고, 너무 오래 내버려두면 마를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대신 자라게 할 수는 없다. 다만 곁에서 기다릴 수는 있다.
그들이 서로에게 배운 것도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상처를 없애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 말하고 싶은 날에는 들어주고, 말하고 싶지 않은 날에는 기다려주는 것. 손을 잡아끌기보다 손을 내밀어 놓는 것. 그리고 그 손을 잡는 순간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
소설의 마지막에서 네 사람은 같은 길을 걷지만 끝까지 같은 방향으로만 걷지는 않는다. 함께 밥을 먹고 웃고 이야기를 나눈 뒤에는 다시 각자의 길로 돌아간다. 누군가 앞서가면 기다리고, 누군가 잠시 멈추면 함께 멈추지만 아무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걷지 않는다. 그 장면을 쓰면서 삶이란 결국 각자의 발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잠시 걸을 수 있지만 영원히 그 사람의 걸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결국 자기 발을 다시 찾아야 한다. 두려움이 남아 있어도 걸어야 하고, 기억이 따라와도 걸어야 하며, 때로는 길을 잘못 들어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는 완벽하게 치유된 사람이 없다.
여전히 문소리에 놀라고, 여전히 어떤 말 앞에서 망설이고, 때로는 자신을 의심하고, 다시 상처받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가 달라졌다. 이제 그들은 자신을 혼자 두지 않는다. 그것이 치유보다 더 현실적인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학은 사람의 상처를 대신 치료해주는 약이 아니라, 오래 닫아두었던 마음의 방에 작은 창 하나를 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오면, 우리는 비로소 방 안에 무엇이 남아 있었는지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오래전의 내가 앉아 있다면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고 곁에 앉아주는 것이다.
“왜 그랬어?”라고 묻기보다 “그때 많이 무서웠구나”라고 말해주는 것. “왜 그렇게 못했어?”라고 다그치기보다 “그때의 너는 할 수 있는 만큼 했구나”라고 바라보는 것.
어쩌면 회복은 거기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았던 나를 다시 데려오는 것.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지금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 화분의 새잎은 아직 꽃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자라고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어느 날, 아주 작은 마음의 방향이 달라지고, 오래 닫힌 문이 조금 열리고, 한 걸음이 다시 시작된다. 그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 다시 돌아와도 괜찮다.
끝난 줄 알았던 자리에서도 사람은 다시 걸을 수 있으므로.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분의 마음 한쪽에도 언젠가 작은 새잎 하나가 돋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새잎을 서둘러 꽃으로 만들지 않고, 오래 바라보며 기다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삶은 어쩌면 그렇게, 상처를 품은 사람들이 서로의 곁에 작은 의자 하나를 놓아주고 다시 자기 길을 걷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 등록 정보(출판사 제출)
작가의 말/2
목차 /6
에필로그/10
1부 어둠
01. 흔들리는 하루/18
02. 2등이라는 이름/23
03. 문이 열리는 소리/32
04. 말을 삼키는 법/47
05. 창가에 서 있는 사람/64
06. 마지막 난간/78
2부 균열
07. 난간 너머의 밤/90
08. 살아 있다는 것/95
09. 상담실의 의자/101
10. 세 사람이 앉은 자리/111
11. 상처의 이름/123
12. 균열 사이로 들어온 빛/137
3부 전하는 삶
13. 엄마의 식탁/148
14. 아버지의 그림자/158
15. 정희의 방/168
16. 상처는 서로를 기다려주지 않는다/178
17. 우리가 서로를 오해하는 방식/188
4부마음의 정원
18.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198
19. 마음의 정원/206
20. 손을 내미는 사람/222
21. 상처가 피운 자리/235
5부 다시 걷는 사람들
22. 다시 올라간 옥상/252
23. 각자의 길/260
24. 다시 걷는 사람들/265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출판사 제출)
부가기호 05800: 독자 대상 교양 · 발행 형태 전자출판물 · 내용 분류 문학.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 · 부가기호 뜻은 국립중앙도서관 ISBN 안내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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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연출판사에서 2026-10-14 출간 예정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 기준). ISBN 9791122171105.
강하영 / 성연출판사. 출간 후 상세 정보가 갱신됩니다.
전자책으로 출간 예정입니다. 정가는 12,000원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 등록 기준이며, 별도 판형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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