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임금을 섬기며 세 번 공신록에 올랐지만 간신으로 기록된 유자광을 재조명한 역사소설. 조선왕조실록을 고증하며 신분 차별과 권력 다툼 속 그의 삶을 따라간다. 소설가 장강명과 『사림, 조선의 586』 저자 유성운이 추천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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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진보-보수로 갈린 한국은
유자광의 조선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당대와 후대를 모두 고발하는 어마어마한 역사소설”
- 장강명 소설가
“현재의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 유성운 『사림, 조선의 586』 저자, 중앙일보 기자
다섯 임금을 섬기며 3번 공신록에 오르고 정1품 무령부원군까지 올랐지만, 역사에는 서얼 출신의 간신으로만 남은 ‘문제적 인물’ 유자광을 재조명하는 역사소설 『누명』이 출간됐다. 유자광은 그간 정치적 숙청이나 기회주의적 처세로 권력과 영달을 누렸다는 비난 속에 ‘간신의 대명사’로 꼽혔지만, 개인의 탁월한 행정·군사적 능력만으로 서얼의 한계를 극복해낸 드문 사례라는 재평가 역시 이뤄지고 있다. 작가는 유자광의 눈으로 조선 전기를 바라보지만, 철저히 조선왕조실록을 고증하며 냉정하게 일생을 따라간다. 조선 전기의 신분 차별과 정치적 지형 속에서 단선적인 선악 프레임을 걷어내면, 사회적 모순을 넘어 생존을 위한 유자광의 치열한 노력이 드러난다. 과연 유자광은 ‘희대의 간신’일까, 아니면 서얼의 차별을 극복한 ‘반영웅’일까? 추천사를 쓴 장강명·유성운 작가의 말처럼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악령처럼 떠도는 ‘사림’의 그림자가 느껴질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던 조선사가 뒤집힌다! 유자광은 진정 시대의 간신이었을까?
유자광은 주류 사학계에서 주인공으로 다루는 인물이 아니다.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도 오히려 낯설 것이다. 세조와 한명회의 계유정란, 연산군과 중종반정, 남이의 역모와 무오사화 같은 큰 사건들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어쩌면 혐오스러운 간신 정도로 기억된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이어지는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다섯 임금 아래에서 40여 년 승승장구했지만, 이후 그를 기록한 역사는 정적이던 사림 신진사대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통성과 명분을 공고히 하기 위한 ‘희생양’이 절실했던 사림들은 조선왕조실록에 공들여 유자광의 악행을 박제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유자광을 시기하고 두려워했는지도 잘 드러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그랬듯, 남곤은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일기」에 확인이 안 된 사실까지 마구 엮은 「유자광전」을 실어 긴 세월 욕보이고 있다.
이로부터 자광의 위엄이 중외에 행해져서 조정이 독사처럼 보고 감히 그 뜻을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자광은 바야흐로 제 세상인 양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으니, 이욕만 즐기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따라붙어 노상 문에 가득했으며, 유림들은 기가 죽어서 들어앉아 탄식만 하고 있으므로 학사는 쓸쓸하여 몇 달 동안 글을 읽고 외우는 소리가 없었다. 부형들은 그 자제를 경계하기를 “공부는 과거에 응할 만하면 그만두어야 한다. 많이 해서 무엇하느냐”라고 하였다. -
“대감을 향한 사림의 원민怨悶이 사무치는데, 대감이 배후가 아니라면 그 원민은 어디로 향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켰다. “허망하구려. 진실보다 원민을 앞세우는 게 그대들이 운운하는 공론인가?” 김철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전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그에게 다시 던졌다. “다시 물어보겠소. 내가 지켜야 할 분수가 도대체 무엇이오?” -
하지만 답을 정해놓고 끼워 맞춘 비판은 결국 실록에 그들 스스로 기록한 내용과도 부딪힌다. 임금에게 아첨하며 일신의 영달을 누렸다지만, 천한 얼자 출신인 유자광에게는 임금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야사로 전해지지만 어릴 적 유자광이 ‘적형’을 가리는 총명함을 드러내자 아비 유규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함께 중종반정을 이끈 공신들조차 그에게 작은 벼슬자리도 허락하지 않고 그를 사지로 몰아갔을 정도다.
만약 그가 종2품 경주부윤을 지낸 아버지 유규의 적자로 태어났다면, 정3품 대언을 지낸 조부 유두명의 음덕까지 두루 누리며 명망 높은 가문의 음덕을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적형인 유자환은 마흔셋에 죽었지만, 이조·호조참판, 사헌부 대사헌까지 지냈다.
얼마 전까지 건춘문을 지키던 갑사에 불과했던 얼자가 느닷없이 임금의 눈에 들어 요직에 앉아 자신들과 나란히 함께 국사를 논하다니. 청류를 자처하던 그들은 나와 함께 조정의 공기를 마시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
“죽지 않으려면 먼저 물어뜯어야 한다!” 신분 차별과 권력 다툼, 생존을 위한 선택
살아남기 위해 유자광은 절치부심했고, 임금을 방패이자 칼로 삼아 살아남았다. 얼자였던 그는 기껏해야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 정도가 최고 출세였을 테지만, 1467년 세조에게 비범한 상소를 올리며 스스로 길을 연다. 그렇게 이시애의 난과 건주위 토벌에 공을 세우며 일약 정5품 병조정랑으로 출세해 후일 적개공신 2등으로 추록된다. 이듬해에는 세조가 온양에서 연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정3품 병조참지로 올라서고, 그해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역모를 고발하며 익대공신 1등, 무령군 칭호까지 받게 된다.
사림이 명분론을 고집하면 세조 이래 왕실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불충으로 이어지고, 왕실이 명분론을 배척하면 유가라는 통치이념이 설 곳을 잃는다. 저 찬란한 명분의 세계 어디에도 태생부터 뒤틀린 내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얼자가 얼자답지 않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나는 철저히 임금의 뜻을 받듦으로써 가치를 증명해 왔다. -
하지만 공고한 신분제의 벽은 높고, 유자광의 재능과 노력은 오히려 저주가 됐다. 그는 성종 때도 응양장군(1470), 숭정대부(1476), 도총관(1477)으로 승승장구하며, 잠시 유배(1478)를 다녀왔다고는 해도 바로 사면(1480)되어 공신공권(1481)과 직첩(1482)을 돌려받는다. 이어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1485)를 제수받으며 동시에 아들의 과거 응시까지 허락된다. 1486년과 1487년 두 차례 명나라 사행에 다녀오고, 장악원(1489)과 사옹원 제조(1492)도 지낸다.
연산군 때는 1497년부터 특진관으로 경연에까지 참석하기 시작하며 겸도총부도총관 숭록대부 무령군(1498)에 오른다. 그해 김일손의 사초 문제를 제기해 무오사화(1498)를 일으키며 연산군의 신임을 얻지만, 곧 중종반정(1506)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1등 무령부원군이 된다. 이 때가 유자광의 정점이었다.
피에 굶주린 대간과 침묵하는 공신들, 그리고 아무런 준비 없이 보위에 앉혀져 겁에 질린 임금. 이 셋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저들이 공통으로 필요로 하는 제물이 있었다. 대간의 분노를 잠재우고, 공신들의 허물을 덮어주며, 임금의 결단력을 대신 증명해 줄 완벽한 제물. 바로 나였다. 조정이라는 거대한 맷돌이 나를 갈아 마시기 위해 어둠 속에서 천천히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저들에게 순한 제물이 되어 피를 뿌려줄 생각이 없었다. -
그에게 끝까지 허락되지 않았던 것, ‘분수를 넘어설 자유’
하지만 불과 반년 남짓만에 아들·손자·사위 등과 광양으로, 평해로 유배 가는 처지가 된다. 중종과 훈구대신들이 나서 유자광과 그 자손의 유배를 풀고 공신녹권을 돌려주려 했으나 삼사의 반대로 모두 무산되고, 결국 유자광은 유배지에서 사망(1512)한다. 그에 대한 사면과 복권, 관작 회복은 꼬박 400여 년이 지난 1908년에서야 이뤄진다.
내가 짊어진 오욕은 기어이 자식들의 발목에도 쇠사슬을 채워 유배지에 함께 묶어두었다. 두 아들과 어린 손주, 그리고 사위까지. 반정에 가담해 일등공신의 반열에 오른 지 불과 팔 개월 만에 벌어진 몰락이었다. -
소설을 관통하는 질문 ‘분수를 지킨다는 게 무엇인가’는 독자들에게도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문무를 두루 갖췄지만, 얼자인 그에게 번듯한 자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큰 공을 세워도 상찬은 그의 것이 아니다. 아비조차 버린 그에게 기댈 것은 오로지 임금의 총애뿐이었고, 그런 그에게 내려지는 벼슬과 공훈, 그의 이유 있는 상소와 제언에는 사림들이 덮어놓고 반대한다. ‘신분이 천한’ 그의 제안을 믿을 수 없고, ‘신분이 천한’ 그의 벼슬이 높으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저들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서얼로 태어남이 내 선택이었느냐고. 노비는 노비로서 노비다워야 하고, 노비 자식은 노비 자식으로서 노비 자식다워야 함이 명분이라면, 노비는 대를 이어 영원히 노비로만 살아야 하느냐고. 그 명분이 정녕 옳고 정의로우냐고.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그렇게 만들 이치가 과연 있느냐고. -
역사가 ‘간신’이라 부른 유자광을 다시 읽는다…우리가 500년 전 사림에게 읽는 것
더불어 이 책을 이끄는 중요한 관점은 사림에 대한 다른 인식이다. ‘신진사대부’라는 산뜻한 이름과 달리, 명문 세가 출신의 그들이 개국공신(훈구대신)을 제치고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 권력 이후 이를 공고히 하는 과정은 권력 부패의 전형을 보여준다. 명분과 진실을 내세우지만, 결국 진영논리로 이어지면 ‘내로남불’이 되는 권력의 부패상이다.
추천사를 쓴 장강명 작가나 『사림, 조선의 586』을 쓴 유성운 기자에게도 같은 맥락이 읽힌다. 500여 년의 시차와 바뀐 세상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반복되고, 세상은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조선 중기의 이야기라기에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 여전히 많다.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이지 못했던 유자광에 대한 역사소설을 이들이 자신 있게 상찬하고 추천할 수 있는 이유다.
『누명』은 한 시대를 장악한 부조리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덕적 명분을 무기 삼아 정치권력 뿐 아니라 사회 담론 전체를 손에 쥔 엘리트 집단이 바로 그 도덕적 명분에 얼마나 충실한지, 어떤 기만극을 펼치는지 보여준다. 어떤 게임을 벌이는지 보여준다. 『누명』은 당대와 후대를 모두 고발하는 어마어마한 역사소설이다. 소설이 시대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힘 있는 소설이다. -장강명 (소설가)
자신을 정의라고 확신하는 세력은 반대편의 ‘자격’을 묻기 시작하고 ‘감별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엔 무엇을 했나, 민주화운동 시기엔 무엇을 했나, 한 사람에게 낙인을 찍고 나면 그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어진다. 소위 도덕과 정의로 포장된 공론은 재판 없이 사람을 유죄로 만들고, 때로는 후손에게까지 불명예를 물려준다. 『누명』이 그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일까. 책장을 덮고 나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유성운 (『사림, 조선의 586』 저자, 중앙일보 기자)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출판사 제출)
고목생화枯木生花 …… 5
파벽비거破壁飛去 …… 11
찰언관색察言觀色 …… 22
권토중래捲土重來 …… 32
고립무원孤立無援 …… 44
증삼살인曾參殺人 …… 56
작시금비昨是今非 …… 66
적비성시積非成是 …… 78
일락서산日落西山 …… 87
유자광전柳子光傳 …… 97
유자광 연보 …… 100
인물지 …… 103
참고문헌 …… 123
추천사 …… 124
넋두리_작가의 말 …… 126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출판사 제출)
부가기호 03810: 독자 대상 교양 · 발행 형태 단행본 · 내용 분류 문학.
분량·판형: 332쪽 · 판형 133*204.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 · 부가기호 뜻은 국립중앙도서관 ISBN 안내 기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세 번 공신록에 올랐지만 간신으로 기록된 유자광을 재조명한 역사소설. 조선왕조실록을 고증하며 신분 차별과 권력 다툼 속 그의 삶을 따라간다. 소설가 장강명과 『사림, 조선의 586』 저자 유성운이 추천한 작품이다. (정진영 (지은이), 무블(무블북스) 펴냄)
무블(무블북스)에서 2026-10-12에 출간했습니다. ISBN 9791191433999.
정진영 (지은이)입니다. 자세한 저자 소개는 출판사(무블(무블북스)) 제공 자료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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