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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녀가 어렸을 때, 나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치과 치료를 예약한 날이면 이야기의 꽃을 더욱 풍성하게 피우곤 했다. 치과에 갈 생각만으로도 무서워하는 아이의 마음에, 잠시나마 웃음이 깃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여우는 사탕을 먹고도 이를 닦지 않아 입속 벌레들에게 이를 내주곤 했다. 벌레들은 여우의 이 안에 굴을 파고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어렵사리 치과 의자에 앉은 여우가 얼마나 심하게 떨었던지, 그만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야기는 갈수록 과장되었고, 허풍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우가 더 요란하게 겁을 낼수록 이야기는 더 우스워졌다.
그때마다 내가 알고 있던 이솝우화와 옛이야기, 그림책에서 만난 장면들이 한데 어울렸다. 한 이야기에서 나온 여우가 다른 이야기의 숲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만난 누군가가 또 새로운 사건을 불러왔다. 익숙한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이어 붙이다 보면,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길이 열렸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 역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손녀에게 말로 들려주던 이야기는 이제 그림과 대화하며 만드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이야기를 창작하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내게는 무척 효과적이다. 먼저 인공지능에게 이솝우화 「여우와 신포도」의 한 장면을 그려 달라고 한다. 그림이 완성되면 가만히 들여다보며 묻는다. “이다음에는 어떤 장면이 오면 좋을까?” 여우의 표정과 몸짓, 나뭇가지에 앉은 새와 숲속의 작은 사물들이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때로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 잠시 멈춰 선다.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넘어가려면 무슨 일이 있어야 할까? 여우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 사이에 어떤 사건을 놓으면 이야기의 인과관계가 더 선명해질까? 그렇게 묻고, 그림을 그리고, 다시 들여다본다. 한 장면이 다음 장면을 불러오고, 그 사이를 잇는 말들이 모이면 어느새 이야기의 집 한 채가 지어진다. 『여우 이야기』도 그렇게 탄생했다.
이 책에는 오래전 손녀와 함께 거닐었던 이야기의 세계가 담겨 있다. 돌아보면 그 많은 허풍 속에는 할아버지의 작은 바람이 들어 있었다. 무서운 일을 앞두고도 잠깐 웃을 수 있기를, 두려운 마음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를. 손녀에게 들려주던 그 마음으로, 이제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여우의 이야기를 건넨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 등록 정보(출판사 제출)
두려운 세계를 함께 건너는 이야기
― 이영식의 그림책 《여우 이야기》를 읽고
높은 곳에 매달린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이영식의 《여우 이야기》에서 여우는 오래된 우화가 정해 놓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포도를 얻으려던 욕망은 까치와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작은 속임수 뒤에는 마음의 불편함이 남는다. 그 마음은 선물을 건네는 손길로, 위험에 빠진 친구를 구하는 용기로 자라난다. 이야기가 펼쳐질수록 독자는 포도를 차지하는 일보다 더 오래 여우의 삶을 채우게 될 것들을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의 숲에는 아름다움과 위험이 함께 있다. 풍성한 포도와 무지갯빛 깃털이 눈길을 끄는 곳에 그물과 가시, 날카로운 이빨도 존재한다. 날개를 가진 까치는 그물에 걸리고, 강철 이빨을 가진 여우는 얼굴에 가시가 박힌다. 숲의 왕인 사자마저 덫에 걸려 몸부림친다. 누구도 자신의 능력만으로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저자는 인물들에게 저마다의 힘을 주면서도,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를 남겨 둔다. 그 빈자리를 통해 다른 존재가 삶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이 책의 우정에는 구체적인 손길이 있다. 여우는 이빨로 그물을 끊고, 까치는 부리로 가시를 뽑는다. 사자가 여우를 보호하다가 여우에게 구조되듯, 도움을 주는 자리와 받는 자리는 계속 바뀐다. 이러한 관계는 강자와 약자를 고정된 이름으로 바라보지 않게 한다. 지금은 누군가를 지켜 주는 존재도 다른 순간에는 도움을 기다릴 수 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능력을 알아보는 동시에, 서로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여우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도 그와 같은 여유가 있다. 여우는 처음부터 훌륭한 친구가 아니다. 말솜씨로 까치를 속이고, 성급하게 덤볐다가 곤경에 빠진다. 그러나 작품은 여우의 잘못을 보여 준 뒤에도 그 마음을 계속 들여다본다. “포도 맛은 달았지만, 여우의 마음 한쪽은 시큼했어.” 입안의 단맛과 마음의 신맛을 나란히 놓은 이 문장은, 얻고 싶었던 것을 얻은 뒤에 시작되는 성찰을 어린 독자도 느낄 수 있게 한다. 시큼한 마음은 여우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 주는 작은 징후다.
이후 여우의 변화는 그가 가진 능력의 쓰임에서 드러난다. 처음에 말솜씨는 포도를 얻는 데 쓰이지만, 사자 앞에서는 공격을 멈추게 하고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만든다. 사자 가족은 여우의 이야기에 웃고, 마음을 기울이고, 무서워서 서로 붙어 앉는다. 여우를 붙잡았던 힘센 존재들이 이제 여우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친구의 그물을 끊는 이빨과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여우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두 가지 힘이 된다.
그림과 글은 이러한 변화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한다. 그림이 앞발에 들린 깃털을 보여 줄 때, 글은 “마음에는 새 길 하나가 남았지”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 곁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놓인다. “땅은 여우를 다시 품어 주었지”라는 문장에서는 실패한 도약이 따뜻한 착지로 바뀌고, “숲은 웃음을 꾹 참았어”라는 문장에서는 나무들의 표정이 살아난다. 이 숲은 인물의 행동이 지나가는 배경을 넘어, 놀라고 웃으며 모험을 함께 지켜보는 공간이 된다.
서술자의 다정한 목소리도 독자를 그 숲으로 이끈다. 특히 사자 가족이 잠든 장면에서 들려오는 “쉿! 모두 조용해야 해”라는 말은 책 밖의 독자까지 이야기 안으로 불러들인다. 독자는 어느새 여우와 함께 발소리를 죽이며 잠든 사자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작품은 독자에게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함께 반응할 자리를 마련한다. 여우의 실수에 웃다가도 그 아픔을 염려하게 되는 것은, 서술자가 인물에게서 애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만나고 헤어지는 게 삶의 이치란다”처럼 서술자가 삶의 의미를 직접 짚어 주기도 한다. 이런 문장에는 경험 많은 어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다만 작품의 여운이 더 깊어지는 순간은 마음의 변화를 사물과 행동으로 느끼게 할 때다. 시큼한 맛, 다시 건네는 깃털, 친구를 위해 상해 버린 이빨은 긴 설명 없이도 관계의 무게를 전한다. 이 작품의 철학은 그러한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숨을 쉰다.
작가 후기를 읽으면 이 다정함이 시작된 자리를 알게 된다. 저자는 치과 치료를 무서워하는 어린 손녀에게 여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겁에 질린 여우가 요란하게 떨수록 이야기는 우스워졌고, 그 웃음 속에는 아이의 두려움을 조금 덜어 주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책 속 여우 역시 친구를 구할 만큼 용감하면서도 치과 앞에서는 떤다. 용기와 두려움이 한 존재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이 장면을 더욱 친근하게 만든다. 그 곁에 친구가 동행하고, 치료실에서는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지막에 여우는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쓴다. 포도를 탐내던 일,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던 일, 위험 속에서 도움을 주고받던 일이 이제 다른 누군가에게 건넬 이야기가 된다. 이 결말은 앞선 모험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여우가 지나온 숲에는 상처와 실수뿐 아니라, 훗날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경험이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우 이야기》를 덮고 나면 숲속에서 글을 쓰는 여우 곁에 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진다. 두려운 일을 앞둔 누군가가 잠깐 웃을 수 있도록, 이야기는 또 한 사람의 곁으로 건너간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출판사 제출)
부가기호 05810: 독자 대상 교양 · 발행 형태 전자출판물 · 내용 분류 문학.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 · 부가기호 뜻은 국립중앙도서관 ISBN 안내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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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 비전출판사. 출간 후 상세 정보가 갱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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