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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찰을 떠나왔을 때 햇살이 사찰의 처마 끝에 머물러 있었고, 비구니는 마당의 보리수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바람은 고요했고 햇빛은 낡은 기억처럼 부드럽게 비구니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비구니의 손끝에는 오래된 염주가 있었다. 그 염주는 세월을 닮아 반들반들 윤이 났고, 구슬 하나하나에 스님이 지나온 길이 담겨 있었다. 속가의 이름, 부모의 목소리, 잠시 스쳐 간 청춘의 얼굴들. 모두 이제는 먼 물결처럼 희미해졌지만, 햇빛이 염주를 비출 때마다 그 모든 것들이 조용히 깨어났다. 스님은 눈을 감았다. 빛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려와 땅위에 수많은 조각 그림자를 만들고, 그 속에 스님의 옛 그림자가 어렴풋이 겹쳤다. 그 순간, 마음 한쪽에서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모든 것은 지나갔지만, 지나간 것들은 여전히 비구니 안에 있었다. 그것이 괴로움이 아니라, 따스한 빛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스님에게는 하나의 자비처럼 느껴졌다. 오후의 빛 속에서 비구니는 더 이상 과거를 버리지 않고 조용히 품었고 그 품음 속에서, 세상은 한결 고요하고 따뜻함을 느꼈다.
- 본문 중에서 -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 등록 정보(출판사 제출)
차례
011 ・ 연리지連理枝
023 ・ 비구니와의 인연
043 ・ 시추기와 컴프레서
059 ・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基心
111 ・ 다시 산사로
169 ・ 탁란托卵
201 ・ 제행무상諸行無常
235 ・ 확철대오廓徹大悟
271 ・ 사바하娑婆詞
|에필로그|
내가 걸어온 길 ・ 331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ISBN 서지정보(출판사 제출)
부가기호 03810: 독자 대상 교양 · 발행 형태 단행본 · 내용 분류 문학.
분량·판형: 339쪽 · 판형 15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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